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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착칸국과 바투

  • AD 최고관리자
  • 조회 1755
  • 몽골
  • 2014.02.1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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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와 그 아들들

칭기스칸은 자기보다 6개월 앞선 1227년 2월 경에 죽은 큰아들 조치에게 이르티쉬 서쪽의 평원을 영지로 주었다. 칭기스칸은 죽을 때, 이 울루스를 조치의 아들들 중 둘째 아들 바투에게 넘겼다. 바투는 1236-1240년에 있었던 전쟁을 통해 러시아 공국들에 대한 종주권과 더불어 옛 킵착과 볼가르 지역을 추가하였다. 바투 칸국은 유럽 지역은 흑해 북쪽의 우랄분지, 돈강 하류지역, 도네츠 등 광활한 영역이었고, 또한 코카스서 북쪽을 잇는 초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고대 스키타이가 지배했던 유럽 전역을 포함시킨 광활한 영토였다. 바투의 칸국은 역사상 킵착칸국, 또는 금장칸국, 형 오르다가 받은 영지는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인 백장 칸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1227년부터 1255년까지 통치한 바투는 칭기스칸 일족의 장자 지파의 가장이 되어 몽골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칸으로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버지 조치의 출생과 관련이 있었다. 네 황자의 어머니인 칭기스칸의 아내 부르테는 조치를 임신할 무렵 메르키트 수령에게 납치되었다. 칭기스칸이 아내를 찾아 왔을 때 부르테는 만삭이었다. 이런 출생이 조치 가문이 처음에는 제 역활을 하지 못한 이유였다.
칭기스칸의 다른 손자들은 조치 가문을 칭기스칸의 정통 가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칭기스칸의 막내아들 톨루이  아들들과는 사이좋게 지냈다. 세째 아들인 2대칸 우구데이가 죽자 톨루의 가문의 장자인 뭉케를 대칸으로 즉위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함으로 서, 다른 지파 가문에 복수하게 된다. 칭기스칸 가문의 다른 지파들 사이에서 바투는 최고 중재자였으며 대칸 옹립자로서의 지위를 누르게 된다.


몽골인들은 바투를 사인칸(Sain Khan. 훌륭한 임금)이라 불렀으며 그의 착한 천성과 관대함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권에서는 그를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학한 행위를 사주한 인물로 그렸다.

바투의 러시아 원정- 정보전의 완승

칭기스칸 죽자  대칸으로 등극한 세째 아들 우구데이는 쿠릴타이를 열었다. 칭기스칸 사망 이후 군사작전에 대한 사항들이 논의 되었다. 러시아와 유럽 원정에 대한 결정은 1229년 카라코롬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결정되었다. 남송, 고려,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새로이 러시아와 유럽을 침공하기로 한 것이다. 정보전의 대가 칭기스칸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몽골의 장군들은 정보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칭기스칸 최고의 명장 수베에데이는 1221-2년에 걸쳐 러시아와 유럽에 대해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고 몽골로 귀환하면서 수 많은 첩자들을 남겨놓고 왔다. 몽골 군대의 정복활동은 이처럼 첩자들과 현지인들에게서 보낸 많은 정보를 토대로 적의 강약(强弱)을 철저히 가늠한 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구데이칸은 러시아, 유럽 원정군의 규모를 15만명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대군을 동원한 이유는 단순히 유럽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복속과 점령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몽골의 정보 담당자들은 우랄산맥에서 서쪽의 대해(大海)까지 완전히 복속시키는데 약 16년 정도 걸릴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서쪽 영지를 받았던 조치의 아들 바투가 임명되었다. 28세의 바투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그는 전쟁 경험이 많지 않아 원정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칭기스칸의 명장이었던 수베에데이가 맡았다. 서방을 향한 몽골의 대군은 1235년에 원정길에 오른다. 이번 정벌전의 목표는 북부의 여러공국들이었다. 1221년 시작된 칼카강 전투에서는 러시아 남부의 18개 공국 연합군이 몽골군에 궤멸되었을 때 여러 공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전사했고 약탈을 마친 몽골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로 돌아오고 말았다.
러시아 북부의 공국들도 남부와 마찬가지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있어 정치적인 통합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몽골군은 러시아를 치기로 결정하기 이전부터 이러한 분열상을 첩자들을 통해 훤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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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통일 800주년 기념하여 초원에서 칭기스칸 근위대 행사를 재현하고 있는 장면..

 

몽골 군인들의 갑옷과 군장은 30kg~ 40kg을 넘지 않은 반면, 러시아나 유럽 기사들의 군장은 70kg이 넘었다. 몽골 말은 작으나 힘이 세고 지구력이 강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3~4마리의 말을 바꿔타며 싸웠다.
유럽의 말은 컸으나 지구력이 약하고 정착민의 말이었다. 그럼 승패는 자명하지 않겠는가?

 

 

북부 러시아의 공멸

러시아에 진입한 몽골 정벌군에게는 북부를 치기전 혹시라도 장애물이 될 만한 인근세력부터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지금의 볼가강 근처에 있는 볼가르족의 왕국부터 함락시켰다. 이어 몽골군은 카마강과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모든 도시와 촌락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젊은 남자들은 훈련시켜 몽골군에 편입되었다.  원정군의 군세는 20만까지 불어났으며, 이후 볼가-불가리아가 있던 곳은 금장한국이 되는 조치 울루스의 일부가 되었다.
볼가-불가리아를 점령한 바투는 1237년 11월 경에 블라디미르 대공인 유리 2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바투가 보낸  사절의 조건은 단 하나, 유리 2세의 항복과 블라디미르의 복속이었다. 유리는 요구를 당연히 거절하였고 한 달 후 주변의 큰 도시였던 리아잔이 몽골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중세 유럽이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성이 아니었다. 다만 도시 주변에 수비시설로서 목책을 길게 둘러치고 귀족들은 중앙부에 저택에서 거주하는 형태였다. 이 당시 몽골군은 단순히 활만 쏘는 기병이 아니라 중국과 서하, 호레즘과의 전쟁에서 공성(攻城)의 경험과 공성 기술자들도 종군하고 있었다. 몽골군이 리아잔의 목책을 무너뜨리는 데는 단 5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시로 난입한 몽골군은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방화했다.
몽골군이 리아잔에서 물러갔을 때는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를 자도 없었다 라고 쓸 정도였다.

본보기로서 리아잔을 철저히 짓밟은 몽골군은 블라디미르 본성으로부터 100km도 떨어지지 않은 콜롬나를 점령했다. 콜롬나 역시 파괴와 학살의 현장으로 변하였다. 이 와중에 몽골군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오던 유리 2세의 아들이 몽골군에 패하고 죽고 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유리가 직접 군을 이끌고 영지 곳곳에 전령을 보내어 시티 강가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블라디미르 군이 천천히 시티강가로 모이는 동안 몽골군은 모스크바 강 위에 있는 조그만 성인 모스크바를 포위했다. 유리는 모스크바 수비군이 잘 버텨준다면 전군을 모아 모스크바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명장 수베에데이가 유리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줄리 만무했다. 유리가 시티강가로 향하는 동안 수베에데이는 수백 km를 우회하여 블라디미르 본성으로 쳐들어갔다. 또 다른 몽골 부대는 약 40km 북쪽에 떨어진 수즈달을 공격했고 수즈달은 단 하루 만에 떨어졌다. 1238년 2월 초, 블라디미르 본성 공격이 시작되었고 본성은 단 이틀만에 함락되었다. 도시로 난입한 몽골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약탈과 파괴를 시작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유리가 시티강가에서 몽골군을 기다리는 동안 몽골군은 블라디미르를 떠나 시티강가로 조용히 움직였다. 유리는 나무와 흙으로 방벽을 쌓아놓고 몽골군을 기다렸으나 오질 않자 3000명의 정찰대를 보내 주변을 살펴보게 했다. 정찰대는  몽골군이 블라디미르 본군의 방벽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리는 방벽 뒤에서 수비를 하고 전군이 몽골군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혀있었고 소수의 기병 뒤에 농민출신 보병들이 뒤 따르고 있는 블라디미르 군은 몽골군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전에 멀리서 날아오는 몽골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유리는 달아나다가 추격해온 몽골군과 싸우다가 목이 짤려 눈밭에 뒹굴었다.

북부 러시아의 가장 큰 세력이었던 블라디미르를 전멸시킨 몽골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로스토프, 유리에프를 함락시키고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노브고로드를 향해 진군했다. 1238년 3월이 되었을 때 북부 러시아는 몽골군의 말밥굽 아래 초토화 되고 말았다. 바투군단은 노브고로드를 진군하는 도중 토르초크라는 조그만 도시를 지나게 되었는데 트로초크의 수비병들과 도시민들이 합심하여 죽기살기로 방어했다. 의외의 복병을 만난 몽골군은 토르초크를 함락시키는데 2개월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계절은 이미 봄으로 접어들고 있었고 얼었던 땅이 녹아 진창으로 변했고 몽골군의 이동 역활을 했던 얼었던 강은 녹아 격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몽골군은 노브고르드 습지에 갇혀 버릴 우려가 있어 결국 노브고르드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몽골군이 북부 러시아를 불과 2개월에 걸쳐 12개 도시를 땅 위에서 지워 없애는 동안 북부 지역에서 몽골군에 맞서 싸우자는 동맹군은 없었다. 1223년 비록 지휘권은 통일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힘을 합쳐 몽골군과 싸우러 나선 남부 러시아 18개 공국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서로 눈치만 보며 힘을 합치지 못했던 북부 러시아의 공멸이었다. 몽골 첩자들이 보낸 정보는 정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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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레믈린 궁전 앞 성바실리 성당 종탑- 이반 4세가 200여년을 통치해온 킵착칸국을 러시아 땅에서 몰아낸 기념으로 이탈리아 유명 건축가를 초빙하여 붉은 광장에 건립했다. 


남부 러시아의 통일- 200년의 복속

노브로고드에서 물러난 몽골군은 휴식을 위해 돈강 주변의 광활한 초원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수 많은 전투로 몽골군도 피해와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그해 봄과 여름은 돈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력을 회복하면서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몽골군은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늦가을까지 기다렸다가 1221년에 점령하였다가 물러난 남부 러시아를 1239년 겨울, 남부 러시아의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부 러시아도 1223년 과는 달리 북부 러시아 공국처럼 힘을 합치지 못했다. 러시아 병사들은 소수의 귀족 중기병만이 훈련이 되어 있었고 병력의 대부분이 도시에서 징집된 민병이거나 시골에서 동원된 농민병이 어릴 때부터 사냥과 기미전술로 익숙한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240년 11월에 남부 러시아의 대도시 키예프 앞에 몽골군이 도착했다. 키예프는 수도이며 많은 성당과 사원이 있는 종교도시였다. 키예프는 다른 러시아 도시와는 달리 목책이 아닌 석벽이었다. 이때 키예프는 이전 칼리프 강가에서 몽골군과 대적했던 므티슬라브의 사위인 다닐로 할리츠키가 다스리고 있었고 그의 장군 드미트로가 수비를 맡고 있었다.
 몽골군의 침공을 맞아 드미트로는 수비군과 성민을 지휘하여 한동안 잘 막아냈다. 몽골군이 러시아의 도시들을 공격할 때 최상의 공격무기는 중국에서 가져온 공성무기였다. 공성무기를 총 동원하여 성벽 구간 중 폴란드 대문 근처 목재로 만든 부분을 집중 타격했다. 12월 5일, 이 목책은 무너지고 말았다.  과거 루시의 수도이자 유서깊은 도시 키예프는 사람이 살지 않은 폐허로 변해 버렸다. 6년 후에 키예프 인근을 지나면서 남긴 기록에서 몽골군의 파괴행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려준다.

그곳에는 겨우 움막들만이 서 있었고 땅은 여전히 죽은 자들의 두개골과 뼈다귀로 덮여 있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키예프가 무너진 후 남부 러시아는 지리멸렬했고 남은 도시들도 점령당하고 말았다. 각 러시아 도시들의 귀족들은 동유럽으로 도주하고 남겨진 백성들은 몽골군의 침략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남부 러시아가 무너진 후 러시아인들은 향후 2백년 동안 몽골인들의 통치차에서 몽골의 칸들을 섬기며 살아가야 했다. Moon


 -다음 회은 바투의 유럽원정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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