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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와 훌레구

  • AD 최고관리자
  • 조회 1038
  • 몽골
  • 2014.02.1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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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의 후예들- 나담축제 말경주장 외곽에서 한껏 모양을 내고 말을 타고있는 몽골 청년들. 몽골 유목민들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말에 올라 초원에서 말과 함께 평생을 보낸다.

 

홀레구와 페르시아

1251년 쿠릴타이에서 대칸 뭉케는 아우 훌레구에게 이란 총독직을 부여했다. 몽골의 군대가 정복한지 20년이 지난 후에도 반항하고 있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조를 집압과  시리아를 정복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아무다리아의 기슭에서 이집트 땅까지 칭기스칸의 관습과 법을 확립하라. 항복하여 네 명령에 순응하는 자는 호의로 대하라. 누구든지 네게 저항하는 자는 그를 굴욕속으로 던져넣어라.
뭉케의 명에 따라 훌레구는 먼저 마잔다란, 알라무트 등지의 높은 곳의 요새에 있는 이즈마일 파의 암살자단을 공격했다. 이즈마일파의 수령 루큰 웃딘 쿠르샤는 훌레구에게 포위되어 1256년 11월 항복하고 만다. 알라무트의 수비대는 12월 20일에 항복했다. 이로써 12세기에 술탄국과 칼리프국을 떨게 한, 무시무시한 종파는 마침내 소탕되고 말았다. 훌레구는 다음으로 수니파 이슬람의 영적 지도자이자 아랍의 군주인 바그다드 압바스 칼리프를 공격하였다. 당시의 칼리프인 알 무스타으심은 자신의 전임 칼리프들 처럼 몽골인들을 책략으로 다룰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칭기스칸 일족이 텡그리 즉, 영원한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선언한 지상의 제국은 어떤 면에서도 위신의 손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칼리프는 홀레구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의 조상들이 페르시아의 마지막 셀죽인들로부터 되찾아온 압바스를 넘겨주기를 거절하였다. 몽골군의 바그다드 공략은 1257년 11월에 시작되었다. 훌레구는 자신의 가장 우수한 사령관인 키트 부카, 장군 바이주, 부카테무르 도시를 포위 망을 좁혀 들어갔다. 이에 겁을 먹은 칼리프는 몽골인들을 달래기 위해 네스토리우스교의 총대주교까지 사신으로 보냈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몽골 군대의 거센 공격으로 요새의 동쪽이 함락되었다. 수비대의 병사들은 중대별로 나누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살해했다. 칼리프가 몸소 훌레구에게 항복하러 왔다. 훌레구는 그에게 모든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고 무시를 내려 놓을 것을 명령했다. 주민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무리지어 투항하러 왔고, 몽골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학살해 버렸다. 몽골 군대의 약탈과 살인은 17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17일 동안 주민 9만명 정도가 살해 당했다고 한다.

홀레구와 기독교

몽골군대의 바그다드 함락은 기독교도들에게는 하늘의 응징처럼 보였다. 불교도인 훌레구는 바그다드 약탈 때 기독교도들의 목숨은 살려주었다. 이는 네스토리우스 교도인 훌레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이 기독교도들을 변호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도들은 674년 동안 지속된 무슬림의 탐학에서 무시무시한 몽골인들이 억압받은 기독교 국가의 복수자로 온 신의 구원자들로 보였다. 7세기에 몽골의 황량한 땅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떠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이렇게 위대한 수확의 씨를 뿌릴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훌레구의 현명한 아내 도쿠즈 카툰은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기독교들은 번영하였다, 홀레구는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기독교도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그의 왕국 전역에 새 교회들이 건설되었다.  

홀레구의 시리아 원정

홀레구의 바그다드 함락은 무슬림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 넣었다. 훌레구는 뭉케가 부여한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복속시켜야 했다. 시리아는 프랑크인들과 무슬림 아욥조로 나뉘어 있었다. 아욥왕조의 술탄인 안 나시르 유숩은 1256년 아들을 보내 홀레구에게 복속의 예를 표했다. 이러한 복속의 표시에도 불구하고 훌레구는 서부 메소포타미아와 무슬림 시리아를 아욥조로 부터 빼앗기로 결심했다. 전쟁은 아욥조의 작은 집안 알카밀 무함마드 소유 영지인 아미르령의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이 원정에는 동방의 기독교도들이 시리아의 무슬림에 대항하여 몽골 원정군에 함께 참전하였다. 오랜 공성전 끝에 함락되고 알카밀은 고문 끝에 죽었다. 몽골 군인들은 그의 머리를 창끝에 꿰어 알렙포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시리아의 큰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전시했다.
아르메니아의 왕 헤툼 1세는 홀레구의 명령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군대와 자신의 사위 보헤문트까지 참여시켰다. 몽골-아르메니아 혼성부대였다. 1259년 9월 아제르바이잔을 나와 시리아로 행군한다. 홀레구와 그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들은 하란과 에에싸의 항복을 받으며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이한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멘비즈를 약탈했다. 1260년 1월 홀레구가 지휘하는 몽골군은 투석기 20대를 동원하여 알렙포에 대해 공성전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단번에 도시를 점령하고 저항을 계속하는 성채도 함락시켰다. 학살은 칭기스칸 일족의 방식대로 철저하고 조직적으로 실시되었다.
엄청난 공포가 시리아 무슬림 전역으로 퍼졌고 몇몇 무슬림 왕자들은 몽골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항복하러 왔다. 이러한 정복은 영구적인것 처럼 보였다. 1259년 8월 11일 대칸 뭉케가 중국 남송 원정에서 급서하자 뭉케의 두 아우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사이에 계승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홀레구 자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대권 계승 전쟁은 포기했으나 쿠빌라이를 응원했다. 홀레구가 이슬람을 무자비하게 박해하자 이슬람을 편애하는 킵착의 칸인 사촌 베르케가 바그다드 학살을 이유로 홀레구를 비난하면서 코카서스 국경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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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의 두 명장 중 한 사람인 수베에데이 장군. 수흐바타르 광장. 정부 종합청사 정문에 칭기스칸 동상을 중심으로 수베에데이 장군과 제베 장군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장군의 후손 들도 대를 이어 칭기스칸 가문에 충성한다.

무슬림의 반격

이러한 상황에서 홀레구는 점령군의 지휘를 키트 부카에게 맡기고 페르시아로 떠난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된 키트 부카는 기독교도들을 호의로 대했는데, 불행하게도 아크레의 호족들은 여전히 몽골인들을 무슬림 보다 못한 야만인으로 보고 있었다. 비록 알렙포, 다마스쿠스의 아욥조 술탄국은 정복되었지만 강력한 무슬림 세력들은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의 술탄국 맘룩 세력이었다, 카이로에서 통치하고 있던 맘록 술탄 쿠투즈는 형세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홀레구의 몽골군 주력이 페르시아로 떠났기 때문이다, 1260년 7월 아미르 바이바르스가 지휘하는 부대가 팔레스타인을 향해 이집트를  떠났다. 맘룩군과 몽골군의 교전은 1260년 9월 제린 근방 아인 잘투르에서 벌어졌다. 키트 부카는 수적 열세에 밀려 패배하고 말았지만 칭기스칸 국가의 명예를 지켰다.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된 키트 부카가 손을 뒤로 결박 당한 채 쿠투즈 앞에 끌려왔고 쿠투즈는 모욕의 말을 내뱉았다. 이에 키트 부카는 내가 만일 네 손에 죽는 다면, 그것은 네가 아닌 신이 한 것임을 인정한다. 순간의 성공에 도취하지 말라! 내 죽음에 대한 소식이 홀레구 칸의 귀에 들어가면 그의 분노는 폭풍우처럼 바다처럼 끊어오를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이집트까지 모든 땅은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말것이다. 그는 몽골인들에 대한, 그리고 칭기스칸 군대가 이룩한 당당함과 정통성에 대한 충성심을 마지막까지 지키며, 목이 잘린 몽골의 명장이었다.

홀레구의 만년

충성스런 부하였던 키트 부카의 죽음을 전해들은 홀레구는 시리아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은 사촌인 킵착의 칸 베르케의 위협으로 인하여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초원을 다스리는 칭기스칸의 큰 아들 조치 가계였다. 형인 바투에 이어 칸에 오른 베르카는 이슬람에 대해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는 무슬림의 모든 도시들을 약탈했으며, 친척들과 상의하지 않고 많은 칼리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알라의 도움을 받아 그에게 무고한 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 라고 말했다.베르케는 무슬림의 맘룩조와 합세하여 훌레구에게 선전포고를 하게된다. 그해 11월 12월 홀레구는 코카서스 국경을 넘어 킵착 칸국의 영토로 진격했지만 베르케군의 급습을 받아 아제르바이잔으로 퇴각하고 만다. 칭기스칸 일족 사이의 내전으로 몽골 정복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홀레구는 1265년 2월 마라케 부근에서 죽었으며, 왕후 도쿠즈 카툰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이 두 사람은 동방 기독교도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두 별, 또 다른 콘스탄틴과 헬으로 애도되었다. 홀레구를 뒤를 이은 새로운 칸이 된 큰아들 아바카(1265-1282)로 이어졌다. Moon

다음 편은 러시아와 동유럽을 지배한 킵착칸국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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