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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몽골리카- 마르코폴로

  • AD 최고관리자
  • 조회 1215
  • 몽골
  • 2014.02.1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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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동방여행

1245년 전까지 유럽사람들은 중국의 비단이나 향신료 등을 실크로드를 통해 아랍상인들에게 공급받았다. 당시 지중해를 주름잡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상인들도 중국이나 인도에서 직접가서 물건을 구해오고 싶었지만 서아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터키와 이슬람교도들이 길을 막고있어 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엄청난 통관세를 요구했고 횡포가 심한 이유도 있었다.

이 철의 장막을 13세기 들어 몽골군이 서아시아를 지배하면서 길이 열렸다. 그야말로 팍스 몽골리카 시대가 개막된 것이었다. 마르코폴로는 1254년 이탈리아의 무역과 상업도시인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마르코폴에게 아버지 니콜로폴로와 숙부 마페오폴로가 큰 영향을 끼쳤다. 마르코폴로가 17세 되던해인 1271년, 아버지, 숙부와 함께 동방여행 길에 오른다. 일행은 흑해와 카스피해를 거쳐 페르시아만에 다다랐으나 이곳에서 뱃길여행을 포기하고 육로로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1274년 대원제국의 수도 상도에 도착하였다. 이 길은 험준한 사막, 폭풍우와 눈사태, 모래바람, 도둑때 등 죽을 고비를 수도없이 넘긴 고행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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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국의 황제 쿠빌라이는 어린 마르코폴로를 항상 곁에 두고 서양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신기한 풍습이나 문화에 대해 듣고 싶어했다. 마르코폴로는 17년간 황제를 모셨는데, 마르코 자신에게도 꿈같은 시절이었다. 점차 중국 문물에 익숙해지자 황제의 명으로 양저우 지방을 3년간 다스리기도 했고, 버마와 인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자 고향이 그리워져서 황제에게 고향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마르코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기회가 생겼다. 1292년 몽골의 한 공주가 페르시아 지역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공주를 모시러 온 사신들이 험준한 실크로드 보다는 바닷길을 원했다. 마르코 일행이 바닷길을 잘 아는 사람들로 알려져 끈질기게 황제를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낸다. 남중국해-말라카해엽-인도양-아라비아 해를 거쳐 호르무즈 항에 도착했으나 수행원 600명 중 항구에 도착한 사람은 고작 18명이었다. 1295년 겨울, 24년 만에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럽의 베스트셀러-동방견문록

고향에 돌아온 마르코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에 특별 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나 패했다. 포로로 잡힌 마르코는 감옥에서 감옥에서 피사 출신의 루스티켈로라는 작가를 만났다. 루스티켈로는 감옥에서 마르코가 들려주는 중국 이야기를 책으로 쓸 것을 제안하였다. 루스티켈로는 프랑스어로 받아 적었는데, 책머리에 -황제나 왕, 공작, 후작, 기사, 도시민 등 이 세상의 여러 인종과 여러 곳의 특이한 풍습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을 읽어라- 라고 적었다. 뒷날 <동방견문록 The Travels of Marco Polo>으로 불린 이 책은 유럽어로 번역되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밀리오레(백만)라는 마르코 폴로의 별명을 붙여 <백만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르코폴로 여행기>라고 불리는 이 책에서 고려라는 이름도 처음 등장한다.

중심적인 내용은 마르코가 17년 동안 머물렀다는 쿠빌라이 치세의 중국 땅이다. 상도와 대도, 항주 외에 많은 중국 도시의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다. 대칸이 사는 궁전, 화폐, 역참, 경제제도와 사회 풍습, 동양 여성에 관한 이야기 등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주제들이 등장한다. 또한 각 지역의 동물과 식물, 광물에 대한 묘사도 어떤 지리서나 역사서적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유럽사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이 책을 통해 마르코 폴로는 당시 유럽인들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함께 모험심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었다.

마르코는 1324년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아직도 내가 본 것들의 절반도 이야기 하지 못했다- 라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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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 전쟁이 가져온 중세의 가트체제(GATT.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지는 이때 만들어진 교역의 체제를 중세의 가트라고 평가했다.

칭기스칸 제국은 13세기 말 태평양에서 동유럽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확장을 계속했다. 칭기스칸과 그의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자유무역 지대를 만들어 동서양 문명의 연결고리를 더욱 강화했다. 이는 중세의 가트체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광범위한 잠재적인 무역지대를 만들어 냈다. 상인에게, 외교관에게, 용병에게 그 곳은 처녀지였다.
동서양 교역로였던 실크로드가 팍스 몽골리카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시 한번 부활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 길들을 몽골 제국이 전 영토를 거미줄처럼 역참으로 연결하면서 최전성기가 도래한다. 이 교역로를 통해 유럽과 중동, 그리고 중국은 유례없이 서로 긴밀하게 접촉하게 된다. 전 세계를 태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몽골의 정복 전쟁이 가져온 예기치 않은 결과였다.

 콜럼버스의 착각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당시 유럽사람들에게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양에 대한 애기는 최대의 화제였다. 특히 부(富)가 넘실대는 동양에 대한 관심은 행동으로 옮겨지는 단계로 발전했다. 동양의 부를 찾아 나서는 상인들의 발길이 동쪽으로 이어지면서 유라시아 지역은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한다.

1492년 8월,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이 대칸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참하고 바닷길을 통해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에는 이미 대원제국이 무너지고 중원에는 명나라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콜럼버스도 여왕도 알 리 없었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향해가면 마르코 폴로가 언급한 대칸이 살고 있는 도시 칸발릭까지 어렵게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항해를 떠나기 전 이 책을 읽은 콜럼버스는 그 책의 여백에 100여개의 메모를 적어 넣었다. 그는 관심이 가는 부분에 토를 달아 두었다. 콜럼버스 최대의 관심사는 동방과의 교역 가능성이었다. 그는 칸빌릭이라는 단어의 왼쪽 빈자리에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교역량>이라는 구절을 적어 놓았다.

서쪽으로 향해한 지 71일 만인 10월 12일, 콜럼버스 일행은 현재의 바하마 제독의 와틀링 섬에 도착했다. 일행은 그 주변에서 여러개의 섬을 발견했다. 신대륙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와틀링 섬에는 <구원의 성자>라는 의미의 산살바도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새로운 땅에 도착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곳이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신천지인 줄 몰랐다. 그때까지도 카리브해의 섬들이 대칸의 나라 중 일부라고 믿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당연히 대칸도 만나지도, 여왕의 편지도 전하지 못한 채 유럽으로 되돌아갔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대단한 선물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인들은 신천지를 손에 넣기 위해 대규모 정복전쟁에 나서게 된다. 유럽이 아메리카를 손에 넣으면서 인류의 역사는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유라시아를 하나로 통일한 몽골의 시대에는 마르코폴로라는 인물을 통해 동과 서과 하나로 접근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라는 세계사에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취업으로 고통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도 마르코폴로처럼 미지의 세계에 두려워 하지 않고 국내에 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해외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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